이번 해는 생각보다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지금도 해야 할 일들이 넘쳐서, 한 해가 정말 마무리된 느낌이 잘 나지 않네요. 하하…
사실 하반기에는 마가 낀 건지 개인적인 일들이 연달아 터졌습니다. 일이 바쁘다 보니 그나마 버틴 것 같아요. 대신 삶에서 꽤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문제에 의미 없이 매달리기보다,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인정하고 해소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는 방식—효율적인 선택과 집중을 배운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그게 제가 이전엔 특히 약했던 영역이었던 것 같네요… 하하. 그래서 내년에는 올해 배운 “선택과 집중”을 연구에서도 제대로 적용해보려 합니다.
연구 측면에서의 선택과 집중
최근 로보틱스 분야는 발전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고, 관심도도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각자의 전문성을 로보틱스에 접목하면서 확장되는 모습이, 예전에 비전 분야가 뜨거웠던 시기와도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느낍니다.
이런 흐름의 배경에는, 로보틱스가 제조와 서비스 산업 전반에서 “이전에는 없던 수준의 생산성 향상”을 만들어낼 거라는 기대가 깔려 있죠. 시장이 커질 가능성이 보이니 대기업들도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것 같고요. 특히 우리나라는 인구 절벽 이슈로 노동력 문제가 커질 가능성이 높다 보니, 관심이 더 커지는 듯합니다.
물론 현재는 외국인 인력이 부족분을 메우는 측면도 있지만, 로보틱스는 그 인력 대비로도 생산성 자체를 끌어올릴 수 있는 수단으로 기대를 받는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관심은 투자로 이어지고, 투자는 곧 연구 “노다지”가 됩니다. 문제는 속도예요. 요즘은 아이디어를 떠올리면 곧바로 유사한 결과가 나오고, 그걸 기반으로 한 후속 아이디어가 다시 빠르게 아카이브에 올라오는 흐름이 점점 더 가속되는 느낌입니다.
로보틱스 연구의 특성 (비전과 다른 지점)
저는 로보틱스도 점점 학회 중심으로 더 빠르게 발전할 거라고 봅니다. 다만 비전 연구와는 결이 조금 다른 특성이 있습니다.
(1) 평가의 난이도와 self-evaluation의 존재
비전은 수집된 데이터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아서 환경을 “재구성”하고 반복 실험을 돌리기가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반면 로보틱스는 실제 작업 성공률로 평가해야 하다 보니, 동일한 환경을 정확히 재현하기도 어렵고 반복 실험 자체가 매우 빡셉니다.
이 차이는 논문 형태에도 영향을 줍니다. 로보틱스에서는 아직까지 자가 평가(self-evaluation)가 비교적 넓게 허용되는 편이고, 현시점에서는 벤치마크를 만드는 것 자체가 큰 컨트리뷰션이 되기도 합니다. 또 “현실에서 페어한 비교를 효율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자체가 연구 주제가 되기도 하죠.
이런 환경에서는, 이전 연구를 베이스라인 삼아 계승 받기 보다 독립적인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경우가 더 자주 보입니다. (물론 이전 연구를 그대로 계승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이전 연구가 친절하게 오픈소스가 되어 있거나, 동료 연구자 네트워크를 통해 구현이 공유되는 경우가 많아 보입니다. 예: 버클리…)
(2) closed source가 여전히 보편적
로보틱스는 아직도 closed source가 흔해서, 이전 연구를 그대로 계승해 확장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이건 신규 진입 연구실에겐 진입 장벽이 될 수 있고요. 다만 이 흐름이 장기적으로는 오픈소스로 이동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습니다. 어쨌든 현 시점에서는 “좋은 아이디어를 빠르게 쌓아 올리기”가 구조적으로 더 어렵게 느껴지는 요인이 됩니다.
(3) 여러 분야가 결합된 high-level application
로보틱스는 기계/제어/전자/컴퓨터공학이 결합된 분야인 동시에, 지능형 문제를 실제 기계 동작으로 풀어내기 위해 촉각/시각/언어/공간 이해/플래닝 등 다양한 요소가 얽혀 있습니다.
그럼 로보틱스 연구자들이 이 모든 걸 완벽히 알고 연구하느냐.. 그렇지 않죠. 대부분은 각자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로보틱스 문제에 맞게 도구를 조합합니다. 그래서 어떤 커뮤니티 관점에서는 “짜집기”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로보틱스 커뮤니티의 핵심 목표는 최신 아키텍처를 ‘개발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지능형 로봇이 지금 당장 풀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그 문제를 풀 수 있다면 도구는 무엇이든 사용할 수 있는 거죠. 비전으로 비유하면, SiLU/GELU를 전부 파고들거나 Transformer의 MHA를 처음부터 끝까지 재증명하는 데 시간을 쓰기보다, 이미 검증된 장점을 인정하고 “잘 활용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빠르게 움직이려면
로보틱스는 특히 (1)과 (3) 때문에 (2)만 어느 정도 해소되는 순간, 정말 빠르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즉, 한 번 모멘텀을 얻은 팀/그룹은 성장 속도가 가파른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이면 모멘텀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럼 “더 빠르게”를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저는 올해 배운 효율적인 선택과 집중이 연구에도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봅니다. 끌고 가던 연구에서 끊어야 할 시점을 정확히 판단해 끊고, 끊어낸 연구에서 남는 핵심 철학은 잘 녹여서 좋게 포장(정리·스토리텔링·실험 디자인)해야겠죠.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제는 그 감을 조금 잡은 것 같습니다. 내년에는 더 잘 끌고 가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