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조금 더 분명하게 알게 된 해”였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눈에 보이는 성과만 놓고 보면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개인 주도의 논문도 없었기에 처음에는 “올해는 뭐가 남았지?”라는 생각부터 들었다고나 할까요 허허
그런데 곰곰이 돌아보니, 이 한 해는 내가 어떤 연구자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일해야 하는 사람인지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들여다본 해 같습니다.
시동이 오래 걸리는 사람?
저는 예전부터 그런 사람인 것 같습니다. 재미있다고 느끼는 일에 한 번 들어가면, 그 외의 것들이 잘 보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집중력도 높고, 그 재밌다는 일에 몰입해서 그 일만 하거든요. 근데 문제는 그 전 단계죠ㅡ 시동이 걸리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거? 열심히 간보고, 이거저거 돌다리도 두들여본 뒤 남들 다 재밌다하고 떠날때서야 재밌다고 몰두하는 성향이랄까요
그런 관점에서 연구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막상 빠지면 하루종일 그 고민만 하고 구조를 그리고 실험을 붙이지만, 그 지점까지 가는 문턱이 늘 높았습니다. 시간도 오래걸리구요. 그래서 올해 개인 논문이 없었던 이유를 돌이켜보면, 연구에 진입하는 방식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연구 말고 그럼 올해 내가 한 일은 없어 그럼?
올해 제가 한 일들 중, 좀 기억에 남는 일들이 꽤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처음 랩장을 맡으면서 연구실 운영에 관여했고, 엑스리뷰 해킹 이슈를 정리하고, 연구실 일정과 행사를 조율하고, 연구실 공간 이전을 하며 세팅을 하고, 인력 양성 관련해서도 정리하고, 연구실 SNS를 관리하고… 솔직히 말하면, 제가 상상하던 “랩장”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습니다 ㅋㅋ
제가 갈등을 카리스마 있게 정리하는 타입도 아니고, 쓴소리를 잘하는 사람도 아니라서, “내가 랩장을 잘한 걸까?”라는 질문에는 지금도 선뜻 답이 나오지 않는 것 같긴 합니다. 다만 분명히 느낀 건, 연구실이 돌아가게 만드는 일에는 비교적 성실하게 임했다는 점입니다.
눈에 띄는 성과는 없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들을 꾸준히 처리하는 역할이라고 하나요? 이 경험을 통해 저는 내가 잘하는 역할과, 잘하지 못하는 역할을 조금 더 구분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인턴 지원, 그리고 자리가 바뀌는 경험
상반기 회고록에서 작성했지만, 올해 인턴십 지원에 떨어졌습니다. 사실 결과 자체에 대한 미련은 크지 않았고, 오히려 그 과정에서 내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그리고 어디가 부족한지를 비교적 냉정하게 볼 수 있던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하반기에 개발 인턴을 모집하면서, 입장이 바뀌어보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해봤던 것 같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면접을 당(?)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보일까”, “이 답변이 맞을까” 고민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누군가를 평가하고 선택해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죠
사람을 뽑는 자리에 서보니, 면접이라는 게 갑자기 다르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마치, 어떤 답변이 신뢰를 주는지, 어떤 태도가 “같이 일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주는지, 기술보다 먼저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이 경험은 단순히 신기함을 넘어서, 산업에서 요구하는 “연구자 상”이 무엇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체감하게 해준 것 같습니다.
비즈니스를 아는 연구자?
이게 무슨소리냐, 제가 얼마전에 기억에 강렬히 남는 사설이 있었는데… 제목은 “비즈니스를 아는 AI 인재 필요” 뭐 이런거 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정확한 사설 제목이 기억나면 링크 달아두겠습니다)
요지는 간단했습니다. “요즘 기업은 더 이상 AI를 잘 만드는 사람을 원하지 않는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기업 채용 시장은 AI 개발자,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를 찾는 열기로 가득했죠. 전공자라면 갓 졸업했더라도 높은 대우를 약속받던 시기였다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AI 인재를 바라보는 눈 자체가 바뀌었다는 표현이 더 맞다는거죠
사설에 따르면, 많은 기업의 경영진들은 “비싼 돈을 주고 AI 전문가를 데려왔는데, 정작 우리 회사의 비즈니스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다.” 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문제가 ‘기술력 부족’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죠. 기업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사람은 AI 모델을 새로 설계하는 연구자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AI 기술을 비즈니스 현장에 접목해 성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며 깨달은 건, 지금 기업이 말하는 “좋은 AI 인재”란 파이썬을 잘 다루는 사람도, 최신 모델을 많이 써본 사람도 아니라는 점이라는 것이죠. 복잡하고 모호한 현장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부터 정의할 수 있는 사람, 즉 ‘맥락 지능’이 높은 문제 해결형 인재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채용 기준도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서류에서는 기술 스택의 나열보다 문제 정의의 서사를 보고, 면접에서는 정답이 있는 질문이 아니라 상황을 던지고…. 그리고 솔루션부터 말하는 사람보다, 문제를 어떻게 진단하고 분석하는지를 먼저 이야기하는 사람이 더 높게 평가된다고 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교수님과의 티타임에서 늘 듣던 말씀이 자연스럽게 겹쳐졌습니다. “단순히 연구만 하지 말고, 회사가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를 보면서 너희의 위치를 파악하고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라는 점이라라요?
솔직히, 그동안 저는 이 말을 막연한 조언 정도로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연구 하나도 너무 버거워요 라는 핑계로 연구를 잘하겠다는 이 단계만 넘기면 교수님의 말씀을 생각해봐야지 변명을 했던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제가 상반기 인턴 면접에서 느꼈던 어색함과 부족함, 그리고 하반기에 사람을 뽑는 입장에 서며 느꼈던 감정들이 모두 이 이야기로 수렴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단순히 그동안 성능, 모델 구조, 실험 설계에만 익숙해지려고 했지, 이 기술이 어떤 비즈니스 문제를 풀기 위해 존재하는지를 생각하는 점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내년 상반기에는, 매번 회고록에 작성하고 반성만 하는 ‘연구를 더 잘하자’는 다짐보다 연구를 어떻게 현장과 연결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특히 이번 개발 인턴들과 함께 일하며, 연구와 서비스 사이의 간극을 직접 마주해보고, 내 연구가 사용자에게 닿는 경로를 구체적으로 상상해보고 싶다고나 할까요 허허
그래서, 매번 작성하던 너의 내년 목표는 뭔데?
매번 입만 터(???)는 거창한 목표를 세우지 않아보려고 합니다. “논문 몇 편”, “어디 투고” 같은 목표 대신, 내가 연구에 있어서 왜 시동이 느린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바꿀 수 있을 지 그 근원이 뭔지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그래도 아예 목적이 없다면 시간만 흐지부지 보낼 것이 염려되니 한번 1분기 행동 목표를 적어보면
“개발 인턴들과 함께 일하면서, 연구와 개발, 기술과 서비스 사이를 직접 연결해보고, 연구가 사용자에게 닿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그려보기” 라고 적어두겠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연구를 다시 한 번 “과몰입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억지로 논문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 스스로를 강제하던 기존에 방식과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 스스로 빠져들 수 있는 방식이 뭔지 치열하게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연구실에 앉아 생각없이 시간을 보내려고 하는 순간마다 이 회고를 다시 꺼내보고 싶습니다.
진짜진짜 마무리하며
2025년은 결과보다는 인식이 많이 남은 해 같습니다. 저는 이제야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인지 무엇에 약하고 무엇에 강한지 그리고 박사라는 타이틀이 요구하는 무게가 무엇인지 조금 더 솔직하게 보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회고는 성과 보고가 아니라, 다음 단계를 시작하기 위한 메모로 남겨두려 합니다. 항상 작성하던 그런 반성문 형식임은 변함이 없으나 마음가짐은 좀 변화되었다 생각하며 글 마치겠습니다!
2026년에는 저희 연구실 인원 모두가 원하던 연구, 일, 행복, 건강 모두를 가지길 바라겠습니다! 새복많!
매년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자연스러운 것이겠지만, 확실히 박사과정으로서 하는 고민의 깊이와 무게는 다르다는 것을 읽으며 느낄 수 있었습니다.
논문도 직접 써보면 남의 논문을 읽는 관점도 달라진다고 하는데, 올해 채용 관점에서 그러한 경험을 하셨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주영님께서 개발 인턴들의 지원서를 보며 좋은 의미로 마음에 확 꽂혔던 포인트가 어떤 부분이었는지도 궁금합니다! 공개 가능한 선에서 언급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