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찬] 2025년을 보내며

이번 회고글은 일요일 밤 자전거 길 위에서 가다서다 하며 핸드폰 메모장에 조각글처럼 모아놓은 생각들에서 시작되네요. 막상 회고글을 써볼까~하고 각 잡고 카페나 집에 죽치고 노트북 앞에만 앉아있는 것보단, 전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없이 돌아다닐 때 오히려 새로운 생각들이 샘솟는 것 같습니다.

평소에도 자전거타고 출퇴근하며 인생 고민을 자주 하는데, 이번 회고를 위한 자전거 길 위의 생각은 왠지 더 깊고 기네요. 사람의 생각은 고이지 않고 늘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터라, 훗날의 제가 이 글을 봤을 때는 또 생각이 달라져있겠지만 지금의 생각들을 한 웅큼 잡아서 여기다 좀 흩뿌려보겠습니다. 흩뿌리는 터라 좀 두서없는 문체인데 연구원분들의 너른 양해바랍니다ㅎㅎ..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연구적으로 말고, 그냥 제 인생을 놓고 봤을 때 대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 걸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그 동안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누군가에게 자신감있고 명확하게 대답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제 인생 추구미를 그동안 누군가에게 말로 설명하기 애매했었는데, 27년 살면서 처음으로 조금은 명쾌히 표현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2025년의 저를 지나간 여러 대화 중 전 특히 저희 로보틱스팀 후배들과의 대화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에 대한 답을 떠올렸습니다. 후배들이 벌써부터 치열히 연구생활과 커리어를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기도 하면서, 되려 제 모습을 돌아보다가 제가 뭘 좋아하고 무엇을 할 때 행복감을 느끼며 뭘 하고 싶어 하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전 ‘감성적’인 ‘지식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저 누군가가 절 봤을 때든, 나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든 아~ 낭만있다 라는 생각이 들게 행동하고 싶고, 정말 내 내면만 생각했을 때는, 잡학다식해지는 것을 꿈꾸며 하나하나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데 희열을 느끼고, 알고 있는 지식들을 서로 연결지으며 저만의 철학과 논리를 쌓고, 그 철학과 논리의 기틀 위에서 첨예하게 새로운 연구들을 깎아나가며 지식인이라는 단어의 범주에 한발짝씩 가까워지는 게 꿈입니다. 당장 내후년이면 박사과정(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뭐 했다고 벌써..)에 들어가게 되기에 이런 생각들을 말로만 하지 않고 연구적으로 성과를 보이기 위해 노력하고 싶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역시 연구적인 회고를 먼저 하겠습니다.

나는 2025년에 어떤 연구를 했는가.

우선 2025년의 저의 연구에 대해서 조금 먼저 돌아보겠습니다.

원래 상반기만 해도 저의 첫 논문 목표는 IJCAS 저널 작성이었습니다. 근데 정신없이 지나가다보니 시간이 부족하여 리뷰 프로세스가 빠른 MDPI Robotics에 첫 저널을 투고해보게 됩니다.

제 연구 주제의 방향성은 “Long-horizon Manipulation 태스크를 위한, LLM 기반 Sub-task Decomposition 수행 시 uncertainty 추정 연구” 였습니다. 기존의 LLM 기반 Sub-task Decomposition 수행 시 uncertainty 추정 연구들에서 scene image 정보와 textual 정보를 동시에 활용하는 방식으로 uncertainty를 추정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꼬집고, 이거 당연히 멀티모달 정보로 uncertainty 추정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의 컨셉으로 문제정의를 했었습니다. 분명 연구 목표와 방향은 크게 문제없이 잡긴 했는데,, 교수님과 태주님의 지도 아래 큰 틀에서의 문제정의만 정했지 저 스스로의 방법론적인 문제정의는 구체화시키지 못한 채 실험 프로세스가 목적없이 왠지 자꾸 겉돌면서 시간을 많이 허비했었습니다. 특히 베이스라인 방법론에서의 실험 프로세스를 빠르게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코드를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과, 애초에 그 베이스라인이란 것을 잡는 과정에 있어서 이거 적용해볼까 저거 적용해볼까 생각이 툭툭 튀고 고민만 하고 있는 저의 안 좋은 성향으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고 그러다가 어느덧 여름이 다 지나가버렸습니다.

초반엔 상당히 이 방법론 저 방법론 헤매면서 모든 실험 가설에서 처참한 경향성을 맛보고, 머리를 쥐어뜯고 영규형이나 우현이와 같이 밥을 먹으면서도 막막하고 답답한 실험 경향성에 한탄을 하기도 했었는데요. 태주님이 그 때마다 튀는 제 방향성을 바로 잡아주셨었고, 문제정의 구체화와 실험적 결과물 정리에 집중을 할 수 있게 자주 디스커션 하면서 도와주시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젠 정말 논문을 쓰기 시작해야 된다는 그 압박감이 절정에 달할 때 쯔음, 정말 번쩍하고 하나의 키워드가 생각나게 됩니다. 그게 제 논문에 사용됐던 핵심 컨셉인 ‘inverse planning’인데요. 뭐 간단하게 말하면 인지과학적 컨셉으로써 어떠한 작업지시에 대해 한 planning agent가 추론한 작업분할결과를 장면 정보와 함께 역계획 추론으로 활용하면 원래 작업지시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컨셉입니다. 해당 컨셉으로 원래 작업지시 의도와 역추론한 작업지시 의도가 유사하면 uncertainty가 작은 것으로, 의도가 유사하지 않으면 uncertainty가 큰 것으로 의도정합성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방법론을 구체화했었습니다.

태주님도 해당 컨셉을 좋게 보시고 언능 실험 경향성 뽑아보고 정리하고 글로 작성하자 해주셨고, 운 좋게도 제가 기대한 것만큼의 좋은 경향성이 나와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었습니다.

하지만 또 문제는 이 때부터 였는데, 머릿속으로 착착착 정리가 잘 되어있었다고 생각했던 제 논리들이 막상 글로 표현하려고 하니까 말이 뒤죽박죽 엉키고 설득력 없는 표현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시간 압박에 쫓겨 글을 쓰고 있자니 정말 고역이었습니다. Intro를 몇 번이고 썼다 지웠다하고 같은 문단을 몇 시간씩 잡고 있어보기도 하고 여러가지 삽질을 했었습니다. Method나 Experiments 파트는 정말 실험했던 내용을 귀찮더라도 조금 더 구체적이고 친절하게 풀면 되니까 글 작성의 방향성 자체는 잡혀있어서 쓰는 데 큰 스트레스는 받지 않았었는데, Intro 작성은 정말 정제된 논리를 요구하는 과정같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태주님의 도움, 승현님의 도움, 그리고 저희 형의 조언까지 정말 많이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찌저찌 큰 뼈대가 잡히고 나서부터는 승현님께서 본격적으로 붙으셔서 계속해서 엉킨 실뭉치같은 제 글을 뜯어내면서 뜨개질처럼 만들 수 있게 도와주셨었습니다.

그래서 다행히 11월 중순 중으로 투고를 하게 되었는데요. 막상 제출하고보니, 오타도 몇개 있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문장도 더러 있고 진짜 정신없이 난리법석으로 제출한 게 실감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제가 스스로 느끼기에 왠지 리뷰어가 꼬집을 것 같은 논리적 결함이 대략 4~5개 있는데요.. 해당 논리결함들은 솔직히 시간과 돈이 있으면 더 보완하고 싶은 내용이었습니다. 근데 제 연구의 실험 자체가 local LLM을 구축하지 못한 채 GPT API만을 사용했던 실험들인지라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엄두가 잘 안나더라구요. 이 연구를 그 만큼의 돈과 시간을 쓰면서 과연 더 첨예하게 보완해야 하는 것이 맞는가? 라고 하기엔 약탈적 학술지라고 소문이 난 MDPI Robotics라는 관점에서 사실 더는 바라보고 싶진 않았습니다. 그저 저는 리뷰어가 제가 예상했던 그 논리적 결함들을 쎄게 꼬집을 경우에만 실험을 추가로 진행해주고, 지금은 이 연구는 최대한 품을 덜 들이는 채로 끝내고 싶다는 마음만이 남았습니다. 아직 언더리뷰라 무슨 리뷰가 올 지 모르겠어서 걱정이 좀 되는데요.. 과제 실적 때문에 급하게 논문을 쓰기는 했지만 일단 제 논문이 빠르게 완성되지 않아 과제 실적이 빵꾸났다는 것에도 좀 마음이 많이 착잡합니다.

아무튼 해당 논문 쓰면서 일전에 KRoC 서베이 페이퍼 4장짜리 작성했던 것은 정말 비교도 안되게 심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힘들고 버거웠던 것 같습니다. 더불어 아무리 MDPI라곤 하지만,, 저에겐 첫 논문 작성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기도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연구의 논리를 글로써 만들어가는 과정을 경험해보았기에, 다음 연구는 좀 더 첨예하게 논리를 깎아 다듬고 예쁘게 글을 작성해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나는 2026년에 어떤 연구를 하고 싶은가?

저는 2026년 상반기의 상당히 많은 것을 벌써 일을 벌여놔버렸습니다. 그 중 핵심이 바로 1월~6월 동안의 개발인턴 프로젝트인데요. 이 개발인턴분들의 프로젝트가 사실 제 연구의 부수적인 중간 목표로써 활용될 예정입니다. 앞선 제 연구에서 Long-horizon Manipulation Task라는 분야를 잠깐 언급했었는데요. 해당 Long-horizon Manipulation Task를 LLM sub-task planning과 VA/VLA 를 함께 묶은 듀얼시스템방식으로 구현하고 싶은 것이 일차 목표입니다. 이를 이루기 위한 저의 동반자들이 바로 개발인턴분들과 저희 로보틱스팀원들이 될 것 같습니다. 구체적인 커리큘럼은 URP와는 좀 크게 차등을 두려고 하고 있고, 전반적으로 그들도 저희도 win-win하는 구조가 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듀얼 시스템을 구축한 이후는 앞서 언급한 연구 주제였던 uncertainty estimation 기반으로 failure detection을 하고 싶습니다. 특히 이번의 uncertainty estimation은 planning 단계에서보다 한 단계 더 내려간 실제 로봇 action의 움직임 관점에서의 uncertainty로 더욱 고도화해보고 싶고, 이를 기반으로 실패탐지 및 재계획까지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실패탐지나 재계획에 대한 연구가 요즘 점차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는 것 같아서, 남들이 내 연구 파먹기 전에 26년에는 반드시 해당 연구로 성과를 하나 내야겠단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 나를 사랑하는 것

지금까지 연구관련 회고나 계획, 다짐을 얘기했는데요. 연구 못지 않게, 그 연구를 행하는 나 자신을 잘 돌보는 건 정말 중요한 사항인 것 같습니다. 회고 쓸 때 좋은 표현들을 몇 가지 잡아보고자, 몇 가지 유튜브 영상을 중간중간 들으며 쓰기도 했었는데, 그 중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영상들을 자주 접해서 해당 소재도 한번 얘기하고 마무리해보겠습니다.

여러 영상 중 인상깊었던 건 이동진 평론가가 등장하는 어느 한 쇼츠에서 접한 표현입니다.

“내가 시간을 어디다 쓰느냐가 곧 나.”, “돈을 어딘가에 쓴다는 건 정말 영혼을 건 결정. 내 가치관을 나타낸다.”

정말 공감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시간은 자비가 없습니다. 내 수중의 돈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보통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나의 돈과 시간을 충분히, 여력껏 쏟아붓습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은 곧 내 자아를 형성하는 무언가가 됩니다.

저는 지식을 습득하는 데 드는 시간이 아깝지 않습니다. 운동하는 데 쓰는 시간이 아깝지 않습니다. 맛있는 밥 먹으며 행복을 느끼는 데에 쓰는 돈이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쓰는 시간과 돈이 아깝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달려가고 있는 이 연구길에 들이는 시간과 품이 아깝지 않습니다.

그래서 돈과 시간, 특히 내 청춘이라는 나의 기회비용을 다 투자하고 희생할 만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저는 스스럼없이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나는 ‘연구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근데 여기서 말하는 내 청춘을 다 투자하고 희생할 만큼의 가치라는 것은 나를 더 많이 몰아붙인다는 뜻이 아니라, 이 선택을 오래 지속할 수 있도록 내 몸과 마음의 상태를 관리하는 것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연구를 하는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막막하고 더디고 힘들고 고된 길이겠지만, 제 인생의 목표이자 내가 사랑하는 미래의 나의 모습인 감성적인 지식인이 되기 위해 연구길에 서있는 순간순간의 나를 또한 사랑해주고 챙겨보려고 합니다. 이 회고글을 읽으실 분들이 많지는 않으실테지만, 이 글을 읽은 연구원분들도 항상 내가 사랑하는 것과 나를 사랑하는 것을 한 묶음 안에 두고 고민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마지막으로,

2025년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전화위복,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2026년을 한 문장으로 기대한다면?

나의 모든 선택들이 후회없는 결정이길 바란다.

Author: 이 재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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