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3년도의 절반이 지나가고 새로운 절반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만 그런진 모르겠지만 x-diary로 반기에 대하여 정리하는 글을 작성할 때가 되면 할 말은 많은 것 같으면서도 막상 하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지난 6개월을 돌이켜보니 부끄러운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어떤식으로 글을 작성하면 좋을지 고민 끝에 제가 이번 상반기에 겪었던 일과 슬럼프 그리고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과정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상반기에 나는 무엇을 했는가?
상반기에는 생각보다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1월부터 3월까지는 결과보고서, 과제 제안서 등 저희 연구실 과제와 관련된 일들을 많이 수행했던 것 같고, 4월 한달 동안은 RAL revision에 허덕였으며, 5월달에는 제 인생 처음으로 유럽으로의 여행 및 ICRA 참석이 있었겠네요.
다양한 일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결과 보고서와 제안서 작업이 이번 상반기 일정에 상당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면, 1월 달에 미래국방 과제의 경우에는 3차년도 정량적 목표치가 달성이 되지 않아서 상당히 고전했던 기억이 남습니다. 이 방법 저 방법 다 시도를 해보아도 전년도 대비 성능 향상이 목표치를 달성하기가 힘들더라구요ㅎㅎ.
그리고 1월 말~2월에는 문체부 과제 제안서 작성을 권석준 연구원과 함께 진행하였으며, 2월달에 산자부 과제 제안서도 작성을 했던 것 같습니다. 과제 제안서 작성 경험이야 올해 말고도 종종 있어왔지만 사실 과거의 제안서 작업은 한대찬 연구원이 주, 저는 부 느낌으로 진행됐던터라 잘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도 잠깐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과제 제안서 작업을 한대찬 연구원 없이도 잘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제 나름대로 내적 기쁨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저 혼자서 주도적으로 한 것이 아닌 교수님의 오더에 따라 수행한 것이기도 하고, 저 말고도 권석준 연구원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던 것이긴 하지만요. (그러고보니 제안서 포맷팅 및 그림 작성에 도움을 주었던 다른 연구원분들도 있었기 때문에 더욱 수월했네요ㅎㅎ)
인생의 거짓말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결과 보고서 및 제안서 작업으로 인하여 1~2월 달에는 생각보다 연구 활동을 잘 수행하지 못 한 것 같습니다. 근데 냉철하게 얘기하면 핑계이긴 합니다. 제가 조금 더 시간을 잘 활용했으면 연구도 하면서 제안서 작업도 할 수 있었는데, 그냥 제안서 작업만으로 “오늘은 이정도 했으면 됐지..” 라는 생각과 함께 퇴근 버튼을 열심히 눌렀던 것 같네요.
그래서인지 3월달에는 비교적 여유가 있었는데, 그때에도 시간 활용을 잘 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 표면적 이유는 ITRC 과제 제안서 작업에 도움을 주느라였지만.. 사실 충분히 연구를 할 수도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당시에도 “제안서 작업 때문에 연구를 못했던거야.”라는 생각을 가지며 퇴근 버튼을 누르기 바빴던 것 같네요.
이러한 저의 태도는 어찌보면 “연구를 하기 싫어”라는 목적이 무의식적으로 생겨서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최근 들어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밑에서 자세하게 얘기하겠지만) 제가 최근에 “도파민 디톡스”를 실천하면서 인문학 및 자기계발서 책들을 읽고 있는데 그 중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의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그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소개드리면, 한 여학생이 많은 사람 혹은 특정 인물과 마주했을 때 얼굴이 빨개지고 이것으로 인해 고민하며 신경쓰이는 증상인 적면공포증이라는 증상을 보였으며 이를 해결하고 싶어라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철학자는 여학생에게 적면공포증을 고치면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물었고 여학생은 이 증상이 고쳐지는 대로 좋아하는 남학생에게 고백을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여학생의 일화는 마음이 있는 남학생에게 고백하기 위하여 적면공포증을 치료하고 싶은 그런 풋풋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철학자는 아들러 심리학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 여학생의 경우 적면공포증을 일부로 만들어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는 좋아하는 남학생에게 만약 고백했다가 차이게 된다면 그 여학생은 상당히 마음이 아플 것이기에 이러한 경우는 반드시 피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만약 적면공포증이 있다면? 내가 그 남자와 사귀지 못하고, 고백하지 못하는 것은 적면공포증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적면공포증을 고치기 전까지는 고백을 할 수 없어.. 그러니 고백할 용기를 내지 않아도 돼. 그리고 이 적면공포증만 고친다면 나는 고백을 할 수 있고 좋아하는 남자와 사귈 수 있을꺼야.. 라는 생각의 흐름으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요약하면, 자신한테 일어나기 힘들고 두려운 일을 피하기 위해(e.g., 좋아하는 이성에게 차임) 의도적으로 사유를 만들어 내고(e.g., 적면공포증을 앓는 행위) 이 사유를 핑계로 자신은 용기를 내지 않고 지금 상태에 안정적으로 머무른다는 것이죠.
이러한 내용을 딱 보았을 때, 저 역시도 이 책의 여학생처럼 행동했던 적이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제안서 작업 때문에 연구를 못한 것이야. 제안서 작업 때문에 운동이랑 영어 공부도 지금은 무리야 할 수 없어. 갑자기 일이 생겨서 이번 주 x-review는 못 쓸 것 같아…” 과연 제안서 작업 때문에 못했던 것일까? 오히려 운동과 영어공부, 연구를 하기 싫어서 제안서 작업이라는 일정의 비중을 더 크게 가져간 것은 아닐까?
물론 제안서 작업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고 연구실 출근하면서 많은 시간을 잡아먹은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어쩌면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다양한 일들이 발생할 수 있고 사건이 터질 수도 있는 것인데, 그 때마다 이러한 일과 사건들을 굳이 부풀려서 꾸준히 해야할 일들(연구, 운동, 공부 등)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연구가 두려웠다.
그렇다면 저는 왜 연구를 하기 싫어했을까요? 그 당시에 저는 연구가 싫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했던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싫다고 인식했던 것인지는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들러의 논리학에 따르면 그 당시의 전 연구를 두려워했으며(목적), 이를 회피하기 위해서 여러 이유들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 기회를 빌려 위에 대하여 생각을 정리해보자면.. 연구를 하면서.. 보다 구체적으론 논문을 작성하는 행위에서 얻는 기쁨보다 상처가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원하던 실험이 예상대로 진행되어서 좋은 성능을 달성하는 것은 기쁘지만, 사실 그런 기쁨 보다는 계속되는 실패로 인한 실망감과 무기력증, 그리고 논문의 글과 그림을 하나하나 작성하고 수정하고 지우고를 피말리게 반복하는 행위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 큰 스트레스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논문을 작성하더라도, 논문이 붙을지 여부는 결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논문의 완성 자체가 지친 심신을 달래주기는 부족합니다. 그리고 몇달 뒤 나오는 리뷰어들의 냉혹한 평가들은 지친 심신이 회복되기도 전에 맞은 곳을 또 맞은 기분이 들게 만듭니다.
다시 리뷰어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피말리는 revision 작업을 끝내면.. 또 다시 몇달 뒤 돌아오는 결과는 reject. 아..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상상했는데 PTSD가 오는 것처럼 마음이 아파옵니다. 그만큼 하나의 논문을 붙이는 과정 자체가 치열하고 혹독하기에 해당 논문이 붙었을 때의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마 도파민이 치사량 수준으로 오르겠지요.)
아무튼 이러한 관점에서, 저는 논문을 쓰는 행위 자체에 두려움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21년도 논문 작업 도중에 생긴 허리의 신경통이 저를 7개월 넘게 괴롭히면서..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저를 너무 괴롭혀왔기 때문에 더더욱 연구가 두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안서 작업 등을 핑계로 계속해서 미뤄왔던 것일지도 모르지요.
논문을 잘 쓰는 사람들 혹은 이러한 길을 이미 걸어온 선배 연구자들 중 일부는 저의 이러한 글에 “원래 연구는 힘든거다. 논문 쓰는게 쉬운 줄 아냐. 실험은 항상 실패하는 것이 default고 논문도 한번에 붙는 사람 별로 없다. 다 떨어진거 다시 쓰고 제출해서 붙이는 거다. 남들도 다 똑같으니 칭얼거리지 말아라.” 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근데 아픈 걸 아프다고 하지 그럼 뭐 “허허 맞습니다, 괜찮습니다, 할만 합니다.” 라고 맨날 어떻게 그럽니까 슈팡. 간호사가 주사 놓기 전에 따끔해요~ 라고 말해주면 뭐 곧 넣을 주사바늘이 안따끔합니까? 논문 쓰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아도 힘들고 몰라도 힘들고, 그냥 힘들어.
…아무튼, 제가 이렇게 칭얼거리는 글만 쓰고 해당 내용을 마무리 지었으면 애초에 시작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연구 그리고 논문 작성이라는 행위에 대하여 이 고통스럽고 힘든 행위를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 에 대한 제 생각이 지금에 이르러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기에 이를 공유하고자 글을 써봅니다.
나는 능력이 부족한게 아닌 용기가 부족했다.
그 전에 다시 책의 내용으로 돌아와보죠. 철학자는 여학생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적면공포증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닌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고 결과가 어떻든지 간에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이를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용기 부여’라고 합니다.
아들러의 심리학에서 ’용기‘란 매우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용기’를 가지고 행동한다면 이는 곧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 책의 전반적인 책의 내용이긴 한데 이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루고는 싶지만 내용이 너무 방대하고 저의 지식의 깊이도 부족하네요.
일단 이번 글에서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힘든 연구 생활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하는 마음가짐을 아들러의 심리학 내용 중 일부를 통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일단 가장 먼저 ‘인생의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생의 거짓말’이란 여러가지 구실을 통해서 ‘인생의 과제’를 회피하려는 행위라고 아들러는 주장합니다.
그럼 여기서 ‘인생의 과제’란 무엇인가? 까지 가게 되면 너무 끝도 없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책을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고, 일단 이 ‘인생의 거짓말’이라는 것은 다시 정리하면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하여 타인에게. 혹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과제 제안서 작업으로 인해 내가 연구를 못했어.” 라는 것 또한 제안서 작업을 해야하는 제 환경에 탓을 한 것이지요. 바람직한 방향은 “제안서 작업으로 인해 평소보다 시간이 부족하니 보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관리하고 불필요한 일들에 사용되는 시간은 줄여야겠어.” 일 것입니다.
결국 아들러 심리학이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나 자신의 생활 양식, 즉 인생을 살아가는 방향과 방식은 다름아닌 나 자신이 결정한다는 관점을 중요하게 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개개인이 어떤 환경에 처해지고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게됩니다. 결국 지금 여기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지는 개개인이 결정하는 것이니깐요.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면, 아들러의 심리학은 ‘용기의 심리학’ 그 중에서도 ‘사용의 심리학’이라고 합니다. 요컨대 ‘무엇이 주어지느냐’가 아니라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인 것이지요. 저는 이 부분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는 종종 이런 얘기를 하곤 하죠. “GPU가 부족해서 이 모델을 못 돌리겠어요”, “데이터셋이 없어서 혹은 GT가 없어서 이런 실험 및 연구를 못하겠어요…” 물론 GPU가 빵빵하면 좋겠지요. 데이터 셋도 충분히 넘친다면 더 좋고 편하게 연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없으면 없는대로, 현재 자신한테 주어진 조건과 상황을 어떻게 잘 활용할 것인지에 따라서 좋은 연구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무엇이 주어지느냐’(이는 프로이트의 원인론으로 볼 수 있습니다.)에 집중하게 되면 위와 같은 상황에서도 결국 문제의 요인들에만 집중하고 이 요인들이 해결되지 못하게 될 경우, 결국 연구를 하지 못한다는 자신만의 이유에 갇혀서 정체된 삶을 이어나가게 되는 것이겠지요.
위에 내용과 이어서, (두번째로 중요한 점은) 우리는 ‘자기 수용’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자기 수용’이란 ‘나’에 대한 견해를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나’라는 내용물이 담긴 그릇은 버릴수도, 바꿀 수도 없습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주어진 나’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활용 방안이 있을 뿐이죠.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하라는 마음을 강요하는 ‘자기 긍정’을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저희는 ‘자기 긍정’이 아닌 ‘자기 수용’을 해야하는 것이지요. ‘자기 긍정’은 “나는 할 수 있다!”와 같이 자기 자신에게 긍정적인 주문을 거는 것으로, 어찌보면 자기 자신에게 할 수 없는 일도 할 수 있다는 거짓말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 ‘자기 수용‘은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그것을 할 수 있을때까지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의 예시를 들어볼까요. 만약 저가 운이 좋게 top tier 학회나 저널에 제 이름으로 논문을 게재했다고 합시다.
여기서 ‘자기 긍정’에 빠지게 된다면 “나는 지금 neurips, TPAMI와 같은 top tier conference or journal 논문의 owner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른 학회에 논문 내서 붙는 건 쉬워”라는 안일한 사고를 하며 현재 저가 무엇이 부족한지, 어떤 점을 더 갈고 닦아야하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게 됩니다.
반면에 ’자기 수용‘의 경우에는 현재 자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으며, 어디까지는 못하는지를 인정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상태를 의미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60점인 상태라면 60점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100점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방향을 찾고 나아간다는 것이죠.
결과적으로 저희는 자신에 대해 ’변할 수 있는 부분‘과 ’변할 수 없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구분하고 ’바꿀 수 없는 부분‘에 매달리는 것이 아닌 ’바뀔 수 있는 부분‘에 주목하는, 즉 ‘바뀔 수 있는 부분’을 바꾸려고 하는 ‘용기’를 가져야만 합니다. (책에서는 매우 중요한 핵심 요소로 자기 수용 —> 타자 신뢰 —> 타자 공헌 —> 자기 수용 순으로의 순환 구조를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순환 구조를 통해 자기 수용에 대한 용기를 가질 수 있고, 타자 공헌을 통하여 (타인의 인정이 아닌) 자율적으로 자기 존재 가치를 실현함으로써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기회가 생기면 다뤄보겠습니다.)
세번째로 중요한 점은 ‘평범해질 용기’입니다. 즉 ‘특별한 무언가’가 되려는 욕심은 버리고, ‘평범해질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범함’이란 ‘무능력함’이 아닙니다. 일부로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노력과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평범해질 용기’를 가지기 위해서는 ‘자기 수용’을 잘 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구요.
이러한 ‘평범해질 용기’에 내용을 듣다보면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개개인의 우상과 목표를 두고 살아가는 것을 하지 말라는 의미인가?” 라고 말이죠.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는데 있어 목표를 설정합니다. 가령 “카이밍 허처럼 인공지능의 거장이 되고 싶어” 라던지, 혹은 “일론 머스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등등이 있을 수 있겠죠. 인생에서 이러한 원대한 이상이나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향해 달려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평범해질 용기“는 이와 반대로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 특별해질 이상과 목표는 중요치 않다고 얘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평범해질 용기“를 가져야만 할까요?
인생이란 찰나의 연속이다.
책에서는 원대한 이상이나 고매한 목표를 등산에 비유합니다. 보통 산을 타는 사람들은 등산을 할 때 산의 정상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죠. 만약 인생이 등산과 같다면,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는 것은 산의 정상을 오르는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정상으로 가기 위한 산길에서 보내고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목표를 산의 정상으로 두었기 때문에, 진짜 인생은 정상에 도달한 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고, 정상에 오르는 그 과정 자체는 어찌보면 가짜 인생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얘기해볼까요? 만약 우리가 등산을 하는데 있어 걷다가 발목을 접지른다던지, 갑자기 심한 비가 내려 산사태가 발생할 것 같아 정상에 오르는 것을 포기한다면, 다시 말해 등산을 중단하게 된다면 이는 실패한 등산일까요?
아까 인생을 등산에 비유한다고 했으니,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생의 목표를 어떠한 이유 혹은 환경으로 인해 포기해야 한다면, 우리는 인생은 가짜의 길을 살아가다가 멈춘 실패한 인생일까요? 인생을 어떤 시작점으로부터 시작하여 목표(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길(line)로 본다면 우리는 그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우리의 인생을 거짓된 인생, 실패한 인생으로 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반면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인생을 선(line)이 아닌 점(point)로 간주합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살아온 인생은 선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무수히 많은 찰나(순간)으로 이루어진 점의 연속인 것이죠. 즉, 우리는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에 집중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해서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수가 되고 싶은 아이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래 연습을 하고 온갖 오디션을 참가하는 등 갖은 노력 끝에 유명한 가수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생을 ‘선’으로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반면에 인생을 ‘점’으로 생각하는 방식은, 그 아이가 항상 노래의 한소절 한소절을 연습하며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가다보니 결국에는 유명한 가수가 되어있더라 라고 보는 것입니다. 즉 인생은 이 찰나를 빙글뱅글 춤추듯이 사는 찰나의 연속이며, 춤을 멈추고 보니 어느순간 어딘가에 도착해 있는 것이지요.
이렇듯 인생을 ‘점’으로 받아들이는 사고 방식은 아까 위에서 언급한 인생의 실패라는 개념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춤을 추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인지, 춤을 춰서 어디에 도착하겠다(즉 인생의 목표에 도달)는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설령 원하는 도착지에 있지 않더라도 인생은 아직 실패하지 않은 것이죠.
인생을 ‘선’으로 보냐 ‘점’으로 보느냐에 대해 또 다른 관점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인생을 선으로 보는 것은 ‘키네시스’적 인생, 점으로 보는 것은 ‘에네르게이아’적 인생으로 볼 수 있습니다.
‘키네시스’란 시점과 종점이 있는 운동을 의미하며, 이러한 운동은 최대한 시점으로부터 종점까지 빠르고 효율적으로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마치 목적지가 정해져있을 때 일반 열차를 타는 것보다 급행 열차를 타는 것이 더 효율적인 것 처럼 말이죠. 이는 바꾸어 말하면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는 경우 그 여정을 불완전하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에네르기아’란 ‘지금 수행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상태가 된 운동을 의미합니다. 쉽게 풀어서 얘기하면 ‘과정 자체를 결과로 보는’ 운동을 말하는 것이죠. 마치 여행을 하는 것처럼 말이죠.
제가 최근에 영국을 갔으니 영국을 예시로 들어보죠. 제가 영국에 여행을 하러 갔다고 칩시다. 제가 비행기를 타고 영국을 딱 찍자마자 누구보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빅벤만 슥 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면, 이것을 과연 여행을 다녀왔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여행이라고 함은, 목적지를 가는 과정을 포함하여 모든 순간을 의미합니다. 집에서 나와서 공항을 가고,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며, 영국에서 도착해서도 영국의 지하철과 숙박을 이용하는 모든 것이 어찌보면 여행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설령 제가 사정이 생겨서 빅벤을 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행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죠. 이러한 개념을 ‘에네르기아’적 인생으로 볼 수 있습니다.
등산도 마찬가지입니다. 등산의 목적이 정상이라면, 사실 사람이 직접 걸어서 가는 것보다는 그냥 자동차를 타거나 혹은 헬기를 타서 5분만에 정상 찍고 내려오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등산이란 정상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가면서 마주하는 식물, 동물, 곤충, 사람 등등의 경험들이 포함되었기에 의미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상에 도착하지 못했더라도 그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기에 등산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간다.
그럼 정리를 해보죠. 인생은 ‘선’이 아니라 ‘점’이다. 즉 인생은 정해진 목표를 따라 걷는 길이 아닌, ‘지금 여기’ 라는 찰나의 연속이다. 그럼 여기서, ‘지금, 여기’를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까요? 책에서는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즉 현재)에 강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라고 합니다.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면 주변은 온통 까맣게 보이고 비춰진 자신만 보이게 됩니다.
즉 과거에 연연해하거나 미래에 매달리는 등 인생의 거짓말을 하며 ‘지금, 여기’를 등한시 해서는 안됩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그것은 과거의 일일 뿐이지 ‘지금, 여기’와는 상관이 없으며, 미래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지금, 여기’에서 생각할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를 빈틈없이 진지하게 살아가면 됩니다.
진지하고 빈틈없이 살아가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 쉽습니다. “논문을 좋은 학회에 게재하고 싶어하는 마음은 굴뚝같지만, 논문을 읽고 실험을 하는 등의 연구는 전혀 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를 과연 ‘지금, 여기’를 진지하고 빈틈없이 살아간다고 볼 수 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설령 논문의 마감일이 6개월 남았더라도, 혹은 여기에 내지 못하면 (시기가 맞는) 다른 학회나 저널에 내면 된다는 마인드를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문제 정의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자신이 제안하는 방법론이 우수하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설령 알더라도 귀찮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매일 조금씩이라도 실험을 돌린다면? 베이스라인 방법론의 논문과 코드를 분석하고 실험을 돌려서 문제점은 없는지 확인한다면? 타 분야에서는 어떠한 기술들이 새롭게 제안되고 활용되는지 논문을 조금씩이라도 읽는다면?
요컨대, 우리는 매일 ‘지금, 여기’에서 춤을 추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오늘 해낸 일‘이 있을 것이며, 이러한 하루 하루가 쌓이다보면 결국 원하는 곳에 논문이 게재되어 있는 목표에 도달해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원하는 학회에 논문을 게재하는 것, 연구자로서 성공하는 것 그 자체가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계속 이야기했듯이, 그저 매일매일 ’지금, 여기‘에 집중하고 진지하게 춤을 춤으로써 살아가다보니, 어느 순간 그 곳에 도착해있었던 것이죠. 즉 큰 목표가 있다거나, 그 목표를 달성했는지 여부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았는지가 중요한 것이지요.
여기서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계속 언급되었던 ‘인생의 거짓말’ 중 가장 큰 거짓말은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가지 않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자꾸만 과거(의 잘못, 혹은 영광)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꿈꾸기만 하며, 정작 ‘지금, 여기’를 돌보지 않는 행위야말로 우리의 ’인생에 가장 큰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생의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왔어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설령 과거에 인생의 거짓말 즉 ‘그 당시의 지금, 여기’를 진지하고 빈틈없게 살아오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지금, 여기’를 진지하게 살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오일러는 우리 모두에게 ‘지금, 여기’를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지금을 결정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마무리 지으며.
어쩌다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사실 이렇게까지 길게 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저희 연구원들의 상반기를 정리한 글들을 읽다보니 각자만의 고민과 걱정이 있는 것 같아 보이며, 그 걱정들 중에는 제가 겪어왔던 고민과 걱정이기도 했었기에 조금의 위로와 도움이 되고자 장황하게 글을 썼습니다.
물론 저 스스로도 단순히 책만 읽은 것인지라 아들러의 철학과 심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며, 그의 이론 중에 납득이 안되는 부분들도 여럿 존재합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연구원 분들 중에 제가 한 얘기가 납득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떻겠습니까. 제가 연구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아들러의 철학이 하나라도 도움되는게 있다면, 이것을 제 삶에 잘 녹여서 살아가는데 지혜로 보탤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아 결과적으로 저는 이 책을 읽고 난 후로부터 (그리고 도파민 디톡스를 하면서) 연구실에서의 집중력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예전에는 약간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연구에 전혀 진척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면, 현재는 어떻게든 실험을 돌리고, 코드를 분석하면서 조금씩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리뷰어에게 악평을 받고, 논문이 reject이 된다고 하더라도 예전만큼 아파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저 논문이 떨어졌으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서 제출하면 되고, 돌리던 실험이 실패하더라도 그 결과 하나하나들이 쌓임으로써 어제의 나보다 현재의 내가 더 발전했다는 것을 느끼면 되는 것이죠.
즉,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예를 들어, 실험의 성공 혹은 논문의 accept 등등)고 하더라도, 그것이 저의 연구자로서의 인생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일러 심리학에 따르면, 저의 연구자 인생은 ‘지금, 여기’에 집중하고, 춤을 춤으로써, 어제의 나보다 한층 더 발전해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내가 속하는 공동체에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로서 의미가 있으며, 이를 통해 행복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23년도 하반기를 보내보려고 합니다. 23년도를 마무리 지으면서 지금의 마음가짐이 어떻게 또 변해있을지, 내가 얼만큼 성장했을지는 모르겠으나, 사실 이 또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를 집중해서 살아가는 것이니깐요.
두서 없는 긴 글을 읽으신 분이 있다면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수님과 연구원님들도 과거와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지금, 여기‘에 집중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행복해지기를 기도합니다.
p.s., 사실 도파민 디톡스 얘기도 좀 풀어야하는데, 내용 흐름 상 연결이 안될 것 같아서 마무리 짓고 도파민 디톡스는 기회가 되면 한번 풀어보겠습니다.
과정론적 행복과 결과론적 행복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한국인의 행복 지수가 낮은 이유를 결과론적 행복관 때문으로 비라보는 학자들이 많지요. 개인적으로 괴정론적 행복관을 통해 우리 학생들의 일상이 힘듬이라는 표현과 달리 그레도 매일매일 살아 갈만하고 나는 행복하다 라고 이야기하는 삶이 되길 기원합니다.